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갈리에누스 ==== 갈리에누스는 아버지 발레리아누스로부터 공동 황제로 임명된 후 라인강을 넘어오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알라마니족을 방어하고 판노니아의 [[잉게누우스]], 일리리쿰의 [[레갈리아누스]]가 일으킨 반란을 토벌하느라 정신없이 보내던 중 발레리아누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갈레리우스는 여전히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방어하기에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포로로 붙잡힌 아버지를 구출하려는 시도조차 포기하였다. 그러나 게르만족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계속된 공격에 서쪽의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연결하는 방어선과 동쪽의 유프라테스강을 이용한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져 갈리에누스 혼자서 로마 제국의 모든 국경을 동시에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방법을 강구하였으나 이는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비판받는 미봉책에 불과하였다. 우선 갈리에누스는 서쪽의 갈리아 제국과 동쪽의 팔미라 제국을 토벌하지 않고 자신을 대신하여 로마 국경을 지켜주는 것으로 생각하고는 로마 제국을 사실상 분할해 버리는 실수를 범했다. 먼저 갈리에누스는 판노니아와 일리리쿰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게르마니아의 두 속주 총독로 임명한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가 전리품 분배 문제로 갈리아 총독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코르넬리우스 사로니누스와 다투던 중 살해해 버리고 말았는데 그 와중에 갈리에누스의 아들도 죽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포스투무스는 현재의 독일 트리어에 해당하는 아우구스타 트레비로품에 수도를 정하고 갈리아 제국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원로원, 집정관, 호민관 제도를 그대로 준용하고 군단병의 지지를 받아야만 황제가 될 수 있는 등 로마 제국의 형태를 그대로 모방한 작은 로마 제국에 지나지 않았다. 갈리에누스도 처음에는 갈리아 제국의 반란을 진압하고자 하였지만 현실적으로 여의치 않았고 어차피 포스투무스가 라인강의 방어를 계속 맡아준다면 그 지위가 속주 총독이던 황제이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갈리아 제국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해 주기로 결정했다. 비슷한 시기에 동방 속주에서도 발레리아누스의 장군이었던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가 두 아들 [[소 마크리아누스]]와 [[퀴에투스]]를 황제로 옹립하자 시리아 팔미라의 귀족인 셉티미우스 [[오다에나투스|오데나투스]]가 자신의 사병을 이끌고 마크리아누스를 토벌한 후 시리아 일대를 장악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오데나투스는 여전히 갈리에누스를 로마 황제로서 대우하였고 갈리에누스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오데나투스를 로마의 속왕으로 임명하고 아나톨리아 반도와 이집트 속주를 제외한 나머지 동방 속주의 방어를 일임했다. 비록 오데나투스는 AD 260년부터 AD 267년까지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었으나 AD 267년 승리 축하연에서 큰 아들과 함께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에 오데나투스의 후처였던 제노비아가 암살범을 죽인 뒤 자신의 어린 아들인 와발라트를 남편의 후계자로 앉히며 실권을 장악하였고 갈리에누스도 이를 인정해야 했지만 제노비아는 남편과 달리 로마의 속왕으로 만족하지 않고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아나톨리아 반도와 이집트까지 공격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로마 제국은 서쪽의 갈리아 제국과 동쪽의 팔미라 제국이 분리되고 말았다. 다음으로 갈리에누스는 국경에 주둔한 로마 군단만으로는 기병 위주의 게르만족을 상대하기 버거워지자 마찬가지로 기병 위주로 편성한 상설예비대를 편성하여 북부 이탈리아에 주둔시켰다. 이 예비대는 기동력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 기병의 비율을 이전에 비해 3배이상 높였고 무어인 경장 기마 투창병과 달마티아 외인 기병 부대, 강력한 복합궁을 사용하는 오리엔트 궁수 부대, 페르시안 장창병대, 쐐기꼴 대형으로 전투하는 게르만계 보병, 낙타부대 등 다양한 병종이 혼합하였다. 이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절에 파르티아식 중장기병의 개념이 도입되었고 카라칼라 황제 시절에는 기병대를 이용한 기동타격대 개념이 등장한 것에서 발전하여 이제는 아예 로마 군단의 중심병과를 전통적인 중장보병이 아니라 게르만족이나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같은 기병 위주로 변경한 것이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실리주의자인 갈리에누스는 기병대장을 원로원 의원을 임명하던 로마 공화정 시절부터 이어져 온 오랜 전통을 깨고 전문 군인을 기병대장으로 임명하였다. 비록 제정 이후 로마 황제에 대한 자문기관으로 실권을 모두 빼앗긴 로마 원로원이었으나 문민 행정과 군사를 두루 경험한 사람만이 로마 원로원 의원의 자격을 얻을 수 있어 로마 원로원은 오랫동안 로마 제국의 인재양성기관을 역할을 하였으나 이제는 그 기능마저도 상실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로마 군단의 중심병과가 중장보병에서 기병으로 변경되면서 지금까지 황제의 후보자 대부분이 군단장이었던 것과 달리 갈리에누스 이후에는 황제 후보자가 기병대장으로 변경되어진다. 마지막으로 갈리에누스는 알라미니족이 라인강을 넘어오자 이를 격퇴하지 않고 협상을 통해 라인강 주변의 국경지역을 내주는 대신에 다른 게르만족을 막아내도록 하였다. 이는 게르만족에게 게르만족의 방어를 맡긴 것으로 로마 제국 스스로 국방의 자주성을 일부 포기했다는 점에서 후대 역사가에게 큰 혹평을 받았고 당대에도 로마 군단 내부에서 갈리에누스가 게르만족 애첩을 두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큰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어쨌든 라인강 방어 임무에서 벗어난 갈리에누스는 도나우강 방향으로 군대를 집중하여 잉겔누우스와 레갈리아누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게르만족을 도나우강 바깥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